메이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

메이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

  • 자 :이노우에 가쓰오
  • 출판사 :어문학사
  • 출판년 :2015-06-04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7-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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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골에 얽힌 수수께끼로부터

제노사이드의 진실에 다가가다




1995년 7월, 이 책의 저자가 근무하던 홋카이도대학 연구실 서가에서 방치된 종이 상자가 발견되었다. 상자에는 낡은 신문지에 싸인 6개의 두개골이 난잡한 모습으로 들어 있었다. 제일 위에 있던 두개골 표면에는 묵으로 직접 쓴 ‘동학당 수괴’라는 글씨가 있었다. 옆에 첨부된 메모에는 이것이 한국 진도(珍島)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 수괴의 효수된 유골 중 하나로, 1906년 진도에서 ‘채취’했다고 서명과 함께 쓰여 있었다. 누가, 왜, 어떻게 가져온 것일까? 이런 의문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이 책의 저자 이노우에 가쓰오는 유골의 조사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의 동학 연구자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고 일본에서 열리는 동학농민전쟁 심포지엄 등에도 참여하는 등 여전히 동학농민전쟁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홋카이도대학에서 발견된 유골의 조사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집필한 『중간 보고서』(1996)와 『보고서』(1997), 그리고 오늘날까지 꾸준히 지속된 유골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쓰였다. 1장, 2장, 4장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을, 3장에서는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일어난 아이누 민족 운동을 주제로 다룬다. 역자 동선희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연구는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 조사로 시작했지만, 일국사의 틀을 넘은 동아시아의 근대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여러 민중의 모습 ? 처절하게 싸우다 스러진 조선의 동학교도와 일반 민중, 군대에 징집되어 남의 나라에서 민중 학살에 가담한 시코쿠(四?)의 가난한 일본인들, 같은 시기에 일본 국내의 식민지화와 수탈에 맞서 민족운동을 발전시키고 있던 아이누인들 ? 이 부각된다.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를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러나 왜 그 유골이 진도에 있었는지, 왜 그것이 멀리 홋카이도대학까지 옮겨졌는지, 과연 누가 그 ‘반출’에 관여했고 그 배경이 어디에 있는지 하는 실마리를 찾는 과정이 이 책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아가 ‘채집자’가 삿포로농학교 출신이고 유골 발견 장소가 삿포로농학교의 후신인 홋카이도대학이라는 점에서 이 학교의 ‘식민학’ 역사도 짚게 된다. 심지어 저자는 자신의 근무처이기도 했던 홋카이도대학의 대학사(大學史)에서 터부시되고 가려졌던 치부까지 숨김없이 드러낸다.

-역자 후기 중에서-



특히 이 책은 저자가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수집한 자료에 근거하여 동학농민전쟁을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1894년 12월 17일 『도쿠시마니치니치신문(?島日日新聞)』은 문경수비대 시마다 다메사부로(島田?三?) 군조(軍曹)가 지인에게 보낸 서한을 실었다. 조령 남쪽의 문경 병참지부에서 동학농민군과 종종 전투를 벌였다. 시마다 군조는 동학농민군을 “보이는 대로 총살해 버린다”, “동학당 같은 것은 우리 일본인 한 명이 200~300명을 당해낼 수 있다. 이로써 저놈들이 약한 적이라는 증거가 충분하다”고 썼다. 한편, 충청도 괴산 부근의 전투에서 체포된 동학농민군 ‘백인장(百人長)’ 박명근(朴命根)은 일본군의 심문에서 농민군이 “일본 병사 한 명에 동학당 백 명이라는 예산으로 싸운다”고 말했다.

일본군 군조는 일본 병사와 동학농민군은 1대 200, 300이라고 하고 농민군의 간부는 1대 100이라고 한다. 어쨌든 전투력의 차이가 아주 크다. 이는 올바른 것일까. 나는 동학농민전쟁 연구자가 실제로 이 문제에 절실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 그 정도로 방대하게 민중을 조직한 동학농민군이 왜 패했나. 동학농민군 내부에 중대한 결함이 있었나…….

참모본부가 편집한 『메이지 이십칠팔년 일청전사(明治二十七八年日??史)』는 조선에 파견된 후비병의 총이 스나이더 총이라고 명기했다. 이 스나이더 총을 실제로 본 연구자는 거의 없었다. 반면에 일본군 정규군은 당시 신형인 무라타 총을 갖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거의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항일봉기에는 죽창과 화승총이라는 열악한 무기가 사용됐고 본문 내용에 나온 것처럼 일본군과 동학농민군의 전투력 차이는 매우 컸다. 그러나 신식 무기를 보유한 일본군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섬멸 작전에는 예정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부대가 필요했다. 저자는 “이 사실이야말로 청일전쟁사에서 정확히 기술되고 재검증되어야 한다”면서 “이 섬멸 작전을 청일전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로 다시 복원하는 일은 현재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군이 전개한 동학농민군에 대한 모든 섬멸 작전은 육군 참모본부가 편찬한 청일전쟁의 공식 전사 『메이지 이십칠팔년 일청전사(明治二十七八年日??史)』 전(全) 8권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면서 자신이 동학농민전쟁을 조사하면서 “삭제되고 은폐된 사실과 새삼 마주치게 되었다”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2014년은 동학농민전쟁 12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이런 기념비적인 해에 이 책이 출간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 인식이 결여되어 동학농민전쟁을 알지 못하는 청소년과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동학농민전쟁을 잊고 지내는 현대인들이 많다. 이 책이 민족운동과 인권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동학농민전쟁의 의미를 많은 이들에게 되새기고 저자가 마주친 “삭제되고 은폐된 사실”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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